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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 피어나다

그림은 누구에게나 정서적인 안정에 따른 위안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예술가의 지순한 영혼이 담긴 그림은 때로는 치유의 영약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진정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이해의 산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을 가능케 하는 것이 조형언어의 마술이다.

그림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오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림을 보면서 아름다운 이상경을 꿈꿀 수 있다면 그것은 치유를 넘어서는,

승화되고 확장된 현실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유성숙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승화된 현실로서의 그림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요구에 흔쾌히 응답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는 밝고 맑은 아름다운 색채와 더불어 시각적인 즐거움은 물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따뜻한 이미지들로 넘친다. 더구나 따스한 기운이 온몸으로 확 퍼지는 듯싶은 느낌의 빛과 광채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 광채는 단지 꽃에서 발산하는 색채의 아름다움에 연원하는 것만은 아니다. 마음의 저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사랑과 행복의 감정으로부터 발화하는 빛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따뜻한 이미지들은 우리의 감정을 평안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져준다.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짓게 하고 행복한 기분에 젖어들도록 이끈다.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현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림속의 정경에 속수무책 빠져드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처럼 아름답고도 순수하며 매혹적인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신향섭 평론글에서

*달라진 생각, 달라진 그림

 

작가의 중심은 80년대의 미시적인 현실보기에서 자연과 자신의 합일이라는 거시적인 현실관, 인생관으로 이동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자연이 되고 대상들이 서로 뒤엉켜 전이되는 상태는 윤회적이며 범신론 적 우주관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사상적 변화는 유성숙의 화면을 분명한 메시지와 치열한 현실의식, 그리고 선명한 이미지에서 흐릿하고 불분명하며 나약해 보이며 혼란스럽기 까지한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다. 이 부분은 80년대의 현실주의 예술관으로 그림을 보아온 관람자들에겐 허탈한 변모로 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 자신의 현재의 상태를 과도가 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애써 잘 그리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관점, 혹은 의식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격변이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표출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과도기를 지난 다음 단계를 예상해보는 것이 현재의 작품의 가치를 현재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보다 현명한 입장일 수 있다. “결론이란 없다. 모든 것을 변화한다. 그 시대를 장악했던 사상, 유행도 아름다움의 가치로서는 부적당하다....미술이란 생활이라는 배를 타고 삶을 노젛어 아름다움(진실, 영원한 것)을 찾아 해매는 것이라 본다.” (작가노트)현재의 것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중심축이 이동한 작가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었일까.” 가능하면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뜸을 원하며 그러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자. ”는 것이 작가의 대답이다. 예술적 성과를 평가하는 것보다 선행되야 할 것은 작가의 변화된 의식과 관점이 얼마나 정교하고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본다. 커다란 변화이긴 하지만 유성숙의 화면엔 그의 독특한 체취와 체질이 여전히 남아있고 자신의 생각이 건강한 성숙도에 따라 그의 그림의 지향하는 바는 다를지언정 80년대의 그림과 비견될 만한 개성적인 모습을 형상하게 될 것이다.

홍대일 샘터화랑 큐레이터

*모조된 아름다움 혹은 우울한 열정-

 

 

<최태만 평론의 부분임>

기술적 숙련성에 의해 만들어진 화려한 그래피즘, 이 아기자기한 이야기들로 수놓아진 작품은 다분히 여성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특징보다 그의 작품을 보다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여잔히 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불안한 보호본능이다. 누가 그랬다던가. 아름답게 죽고싶다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그리고 지극히 감상적인 이 말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말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보다 더 힘들지 않는가. 그러나 그 삶을 위해 그가 투여해야 할 노력은 실로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몇 개씩 넘어온 그에게 ‘아름다운 삶’은 무엇보다 그 자신이 스스로 지켜야할 약속이며 숭고한 목표이다. 그래서 그는 관용과 인내, 용서와 사랑의 방법을 배운다. 그의 그림은 일차적으로 자기사랑의 한 방식이자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는 아름다운 삶의 실천을 위해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위장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보호본능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또 하나의 자신을 억압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 속에서 또 하나의 그는 항상 은폐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 속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청색조의 색체가 그의 이러한 심리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청색은 우울과 결핍, 창백함이란 정조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가라앉은 색체, 즉 사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색이라 할 수 있다. 청색은 또한 동경과 향수를 자극한다. 그의 화면속에서 청색은 매우 지배적이지만 그것이 배타적이지는 않다. 수용과 침탈, 확산과 수렴, 상승과 정체의 갈등을 표현함에 있어서 청색만큼 적절한 것이 어디있을까. 이 색조는 끊임없이 자기자신으로 돌아오기를 요청한다. 그래서 그는 청색의 그 거울 속으로, 유리잔 속으로 꽃다발 속으로 바다물 속으로 한없이 빨려들며 급기야 그자신이 그것으로 전화되고 만다.

그의 최근 작품은 매우 설명적이며 소박하다. 그것이 그의 작품에서 돋보였던 회화성을 제거하는 요소가 될 수는 없지만 어떻게 보면 그는 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의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과거에 그의 작품에서 표출하였던 심리적 가의눌림이 이런 방식으로 바뀌었다 할 지라도 나는 이 변화를 생의 환희에 대한 노래로서만 이해하고 싶지 않다. 화려함 뒤에 잠복된 우울한 정서, 불안과 고독, 긴장에 대해 나는 앞에서 이야기했었다. 그의 작품을 찬찬히 흝어 보노라면 그의 이 작품이 고통의 산물임을 알 수 있으리라. 생의 환희에 대한 예찬은 단지 그가 이르고자하는 목표일 뿐이다. 그는 그 과정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재하고자 한다. 그것이 끊임없이 자기자신 속으로 파고드는 이유이자 원인인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해방임을 그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얼마나 힘겨운 자기와의 투쟁을 수반해야 하는가. 거의 자기최면에 가깝도록 자신에 대해 채근하는 그의 모습을 나는 그의 작품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제 한 사람으로 준재하기 위해.

최태만/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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