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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미술관 기획 유성숙 작품전

곤두선 意識의 執拗性

 

張 慶 晧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구분되어 드러나는 국면들을 애초부터 나눠 갇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들은 그들의 감성이 천착한 나름의 국면을 응시하며 그것을 긴장이라고 불리는 의식의 핏줄을 통해 시대의 몸체 속으로 순환시키려고 한다. 이 때, 작가가 응시한 국면이 무엇이 였던 간에 작품은 하나의 의식되어진 총체적 결과로서 작가가 드러내는 세계의 모습으로 시대현실 속에 위치하게 되는데, 이렇게 題詩된 세계는 그 긴장된 의식의 흡입력이 지탱하는 시대성과 더불어 우리를 또 다른 경험으로 인도한다.

예술과 세계, 예술과 시대현실과의 관계에서 볼때, 바로 이 <드러냄>의 일 속에 이른바 고독한 실천으로서의 예술행위의 실천적 명제가 想定되어 있다.

유성숙의 작품을 대할 때, 먼저 나는 작품의 전반적인 상황속에 침투되어 있는 끈끈하고 집요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거의 직관적으로 접하게 되는 이 집요함은 작가자신의 다면적 성격처럼 여러갈래의 시선이 얽어놓은 굴레이기도 한데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 작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작가의 작품이 지니는 표현구조의 통일된 속성-작가나름의 어법을 그에게서도 찾아볼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의 의식이 담겨놓은 팽팽한 긴장의 袨音은 보다 앞질러서 삶의 구석구석에서 만나게 되는 다반사적인 싸움에서의 패배와 이를 용인치 않으려는 곤두선 의식의 집요성으로 울려온다.

그런데 그의 작품을 그 전체성에서 살펴볼 때,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차라리 지친 의식의 단면들이다. 그것은 몹시 퇴색된 그리하여 덜미를 잡히거나 지루하고 답답한, 어쩔 수 없는 그렇고 그런 삶의 표정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표정들은 화면속에 직접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지는 않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상황은 대게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된 그 형상들과 그 형상들에 집요하게 늘어붙는 끈적거림, 또 그것을 감싸고 있는 단순하면서도 묵시적으로 처리된 배경들이다. 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근원적 질료로서 이들 요소는 가시적 한계 내에서는 매우 불확실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의 화면은 일차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동작의 어떤 상태와 만나게 한다. 그가 배려해둔 형상들이 취하고 있는 단편적일 수 밖에 없는 동작의 편린들은 얼른 구분되지 않는 상태 속에 놓여있다. 그것은 선뜻 접근되지 않는 진의를 숨겨둔 체 아직 진행중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떤 동기 또는 목적에서든지 눈앞에서 전개되는 동작을 그 구체성에서파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만큼 그의 연출 의도 속에서 드러나는 동작의 정체는 지극히 細絶되어 있어 불확실한 가운데 다양한 연상의 가능성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는 어쩌면 이 불확실한 상태를 통해 흡수된 시선을 볼모로 지루한 흥정을 벌이려고 하는지 모른다. 자유로운 연상의 영역에서 내릴 수 있는, 어차피 저의적일 수밖에 없는 동작에 대한 서술적 해석은 또다른 질료들에 의해 조절된다. 예컨대 쫓긴다든지, 빠졌다, 뗄려고 한다 따위가 그러하다. 사실 그의 의중에는 이런 미묘한 거래로 생기는 전자의 느낌을 자신이 격고있는 갈등속에 동참시키려는 노력이 숨어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는 보다 응축된 시선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이 작가를 주목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예의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끈적거림과 형상이 빚어내는 묘한 관계속에 갈무리되어 있다. 희뿌연 점액질인가 하면 진흙탕 같아서 땅-대지-의 연속인 듯 십고 때로는 진물려지는 육체이거나 육신으로의 이행과정 속에 있는 물질들 같기도 한 끈적거림들, 그렇지 않으면 뒤틀림이나 엉킴으로 나타나는 이 끈적거림은 그가 구사하는 독특한 어법의 연장에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주시한 국면들을 농축시킨 다분히 함축적인 방법으로 동원된다.

형상과 끈적거림의 관계에서 보면 상황을 형성하고 있는 두 질료는 대립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예각화된 의식의 대립이다. 왜나하면 과감하게 절단된 부위들에 의해 진행 중인 동작의 주체가 은폐되어 있다하더라도 이것은 우리 시선을 대립상태를 향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신체의 일 부인만큼 결국 인간 행동의 연장이며, 그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렇게 보아 두 질료의 대립은 응시된 국면과 자신, 또는 인간과의 관계속에 상전되는 가해와 피해의 대립이다.

유성숙은 이와같이 가해와 피해의 드라마를 통해 다분히 묵시적인 방법으로 현실의 국면을 드러내놓는다. 그리고 이렇게 드러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의 모습은 아무래도 긍정적이지 못한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이루어내는 끈끈한 분위기와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두 질료의 대립이 자아내는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불러들이는 싸움의 결과에 연유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바 표면에 뭍어있는 피해의식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나로서는 확연히 짐작키는 어렵지만 그가 승리자의 입장에 서있지 못한 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이런 의미에서 화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여지는 또는 보여지지 않는 가해성까지도 그는 어느정도 수긍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삶의 현장 -세상을 살아가는 작가자신의 경험에서 추출된 결론이라 보면 결국 그는 현실 긍정이라기 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수긍의 입장에 선 싸움의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 그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지친 육신의 인정이며 그것이 갖는 구성력에의 용납이다. 그리하여 그는 현실 수긍의 연장에서 찾아오는 심리상태에 자리하고 있는 패배적 허무적 색체를 내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현실이란 결국 화평스럽고 쾌적한 삶의 생기를 북돋아주는 공기주머니가 아니라 그를 옥죄고 있는 불만스러운 질료들로 형성된 하나의 질곡이다.

그는 과연 이러한 질곡의 한가운데 어쩌지도 못하는 포우즈로 서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의 작업은 매우 엉뚱한 지점에 놓여있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읽음(분석)과 울림(직관)의 차이에서 오는 상반된 느낌은 한동안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그것이 시사하는 바, 패배적 표정들이 자아내는 집요성이라는 정황은 결코 그가 싸움 자체를 포기하지 않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그의 작품이 패배주의의 산물이 아님을 말해준다.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다분히 개인적이다.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아직도 그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기실 그는 자신이 격고있는 내면의 갈등을 송두리째 화면 속에 쏟아놓는 듯한 감이 있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화면속에 일어나고 있는 주도적 속성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말하자면 작품의 표현구조가 일원화 되있지 않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가족의 현장이거나 피해의 현장이 아닌 가족과 피해가 빚는 갈등의 현장으로서 그의 화면은 어차피 개인적 심리적 상황으로 설정된다. 그리하여 보다 객관화된 보편적인 현실, 보편적인 현실, 보편적 인간상황으로 나아감을 차단시키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차단은 어렵게 획득한 형상들의 거대한 일류전적 효과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좀 더 철저한 그리고 정제된 어법의 운용은 재빨리 갈등에서 벗어남으로써 가능하게 될 것이다.<나>가아닌<우리>의 지평에 선 의식, 그 의식의 끝머리로 뜨이는 눈은 결코 저 묵시적 배경뒤에 잠자고 있는 방관적인 눈일 수는 없다. 물론 이러한 지적들은 나의 바램에 지나지 않지만 그가 화면의 주도적 속성을 자신 속에서 조정할 수 있을 때, 갈등의 굴레를 벗어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을 때 화면을 뚫고 나오는 깨어있는 빛나는 눈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그는 그런 소지를 충분히 잠재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갈등을 값지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의식은 결코 만만찮으며, 그런 의미에서 가해와 피해의 드라마 속에서 드러나는 피해의식마저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시련으로 다가온다면 너무 과다한 해석일까. 아무튼 그가 시대의 바람을 견디며 집요하게 자신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을 양보하지 않고 시대를 견뎌내려는 한 인간의 몸짓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바로 이 몸짓이야 말로 그의 작품을 대할 때 우리를 옭아매는 집요성의 정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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